[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치열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나이 들면 잊고 살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새해를 맞아 포도주 잔 부딪힐 사람 없어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슬픔은 뱀처럼 생의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세월이 민들레처럼 후 불면 날아가 버린다 해도 허공에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가슴에 얹는다. 가슴이 뛴다. 살아있다는 이 작은 축복!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꽃피는 시간이었다. 옛날 사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시절이 정말 좋았다는 걸. 얼굴 예쁜 여자는 나이 들어 주름 생기면 못나 보이고, 못생긴 여자는 늙을수록 튼실해서 덜 늙어 보인다. 인생 후반기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마음먹기 따라, 정성들이기에 따라 외모와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이 들면 모든 게 평준화된다. 비슷한 생각, 같은 사고로 고착된다. 비슷하게 늙어 평준화된다. 인격은 평준화 되지 않는다. 인격은 나이와 상관없이 천차만별 차이가 난다. 인격은 끊임없이 갈고 닦고 연마해야 한다. 괜스레 허무가 가슴뼈 치고 달아나고, 할 일은 많은데 손에 안 잡히고, 영문 없이 부대끼는 날은 벗과 나누는 수다가 정답이다. 하릴없이 맘이 싱숭생숭해 내 코도 석자인데 친구의 말 못할 사연을 듣는다. 모든 일에 적극적인 친구는 여러 단체에서 회장을 역임했는데 자신이 아끼던 단체의 후임 회장이 배신(?)을 때린 것. 친구는 그 때부터 모든 활동을 접고 몇 년 전부터 은둔생활 하다시피 인연을 끊고 지낸다. 잘 잘못을 가리면 누가 옳았던 간에 두 쪽으로 갈라진다며 친구는 전면 후퇴했다. 살다 보면 높은 산도 깎이고 구릉도 채워진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로 단합했던 사람들이 꽃다발과 선물 들고 새해 벽두 인사로 친구를 찾아왔다. 회장 할 사람이 없으니 한인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 분노도 노여움도 잘 익은 술처럼 달달해지는 때가 온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는 것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힘 세고 권력을 등에 업는다고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는다. 달려드는 사람과 싸우지 않는 것이 쉽게 이기는 방법이다. 무저항주의를 이길 만큼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는 없다. 탑을 쌓기는 오래 걸리지만 무너트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지만 새 술은 새 그릇에 담으면 된다. 한 때는 밥을 나눠 먹던 우정의 민낯을 본다. 중소 도시는 한인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곤욕을 치른다. 큰 도시는 명함 찍고 한국 정부 인사와 사진 찍는 기쁨이라도 있지만 중소 도시는 명예도 권력도 없이 봉사하는 자리다. 근교 도시들도 회장할 사람 없어 한인회가 임시 휴업,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한인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경비 절약 하느라 화랑 부엌에 솥 걸어 놓고 육개장 냉면 잔치국수 끓여 먹으며 일심동체로 뭉쳐 일하던 동지들이 있어 좋았다. 동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다시는 그 치열하고 멋진 때로 돌아 갈 수 없다 해도 담담하게 오늘 하루의 빗장을 연다. 한인사회에 만연하는 갈등과 분열은 감투 다툼이고 졸개들의 행진이다. 유사한 혹은 동일한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투쟁한다. 실제로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는 적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타인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내 잘못을 깨우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게 사는 일인지를 안다. 작고 앙증맞은 작은 풀잎 하나도 밟지 않고 내 길을 갈 수 있기를. 눈을 감으면 치열했던 어제의 불꽃이 타올라도, 담담하게 가슴 속 모닥불 지필 성냥을 찿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무가 가슴뼈 근교 도시들 분노도 노여움도